서예이론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7

심연 윤혜진 2013. 8. 24. 11:35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7

 

 송 종 관 (철학박사 · 무심서학회 회장)


  3. 조형과 포백의 철학


  1) 조형


  서예는 일종의 추상조형예술이다.

  일반적 조형예술은 회화 · 조소 등과 같은 것이다. 조형예술은 사물을 모사하거나 혹은 보이는 사물을 주관 현실 상형대로 표현함으로 형상예술이라고 말하지만, 서예는 형상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 상형과 그들의 형체와 동태를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점획 · 서체 · 조형 모두가 객관 현실 상형을 반영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예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기본적 특징이 그들의 형상성에 있기 때문에 형상과 현실형상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형상이 없다면 예술 창작이 불가능할 것이다. 서예 또한 현실형상인 구상(具象)이 없었다면 예술로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현실형상의 구상을 반영하여 객관적 기호와 부호로 전개되고, 이것이 급기야 추상조형으로 전개된 것이다. 추상조형 예술은 주관 현실적 형상을 원본대로 표현하는 구상예술에 비해 객관 현실의 ‘주관진실(主觀眞實)’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관진실의 표현은 주관적 의사와 성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국한성이 있는 구상에서 객관현실성을 탈피하여 주관진실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조형예술 모두가 그들의 형체(形體)와 동태(動態) 같은 현실형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조형은 글자를 만드는 원리상 회의 · 가차 · 지사 등의 문자도 있고, 우연히 본 현상에 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현실형상이 예술 미학의 관점에서 필연성의 의의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생명 · 혈육 · 근골 · 기세 · 느껴지는 힘의 정도 등과 같은 형상미(形象美)와 평형 · 대칭과 변화 · 다양성의 통일 등과 같은 형식미(形式美)의 규율은 모두 객관적 필연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충분하던 충분치 못하던, 스스로 깨닫던 깨닫지 못 하던 지의 구별은 있으나, 예술현상에 반영할 것인지 반영하지 않을 것인지의 구별은 필요하지 않는다. 형식미의 규율은 유심주의(唯心主義)에서도 인정한다. 다만 절대 이념적 체현을 유념(留念)하여 이것은 초현실적 · 순수 추상적인 문제라고 말하면서 현실의 모든 형상에서 스스로 깨닫던 깨닫지 못 하던 간에 형식의 추상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나 활용 도구에서 불평형과 부대칭을 즐기지 않는다. 즉 불평형과 부대칭인 활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외에 오관(五官)이 단정하고 사지(四肢)가 건전한 사람이어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오관과 사지의 평형과 대칭이 파괴된 사람이라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아름다운 사람은 혈 · 육 · 근 · 골의 균형이 갖추어져야 하고, 건전한 사람은 왕성한 혈기와 함께 활발한 운동성이 있어야 한다는 아름다움의 규율이 우리의 생각과 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예의 형상미와 형식미인 ‘자태(姿態)’를 아름답게 창조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감과 형상감의 규율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가 그것을 인식하는 단계는 스스로 깨닫지 못함에서 시작하여 깨달음에 이르며, 초급단계에서 고급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형식과 형상규율의 실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우리가 실천하는 과정 중에 형식미와 형상미의 규율을 수천 · 수만 번 답습하지만 오히려 명확한 해석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다. 서예미를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서예미의 근본을 투철하게 인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문제점에 부딪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위해 우리들은 서예미의 추상성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있게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이 서예를 감상함에는 실제적으로 감상하는 그들 자신의 본질 역량만큼의 미의기준으로부터 감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예미를 감상하는 그 사람의 안목이 그 사람의 본질역량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다만 감상자가 더욱 관심을 기우려 깊고 자세하게 관찰한다면 그 작품에서 나타내 보이고자하는 확실한 의미를 깨달을 수는 있다. 그 의미는 많은 관상의 대상 속에 있으며 이러한 의미를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순간 감상의 안목이 높아지게 된다. 감상자가 안목이 높아지면 질수록 보는 것이 즐겁고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 많아 질것이다. 이것이 곧 자기 본질역량의 향상이다. 이 본질역량의 향상은 더욱 고아한 감상과 창작의 지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과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본질역량의 현실은 사유를 자아내고 정신을 비동(飛動)하게 하므로 더욱 미의 향수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의 향수는 서예미 뿐만 아니라 건축이나 일반 생활 예술미에서도 얻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각종 아름다움의 구성 규율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작가로부터 창조된 예술품은 실용목적과 동시에 형식감의 완전한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삶의 의미와 함께 작가의 본질역량을 충분히 보여준 현실은 감상자들에게 사유의 정감과 생활의 의취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것으로부터 미의 향수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본질역량에 의해 창조된 서예미의 추상성은 점획이나 글자의 결구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매우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둥근 선은 자연스런 유동(流動)의 의미를, 평평하거나 곧은 선은 평정의 의미를, 파도치는 상태의 무늬는 파동의 의미를, 모난 형태는 단정함을, 역삼각은 불안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러 형태에서 선형의 이해와 심미심리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응중(凝重) · 경건(勁健) · 우미(優美) · 아나(婀娜) 등의 느낌을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 자기 자신도 모르게 느낄 때도 있다. 작가는 창작 과정 중에 자기의 심미수양이나 문자조형에 의거해 붓으로 이와 같은 다양한 선을 운용하여 생명의 의미가 담겨있는 결구를 이루어 낸다. 이러한 점이 추상조형이기 때문에 서예를 추상조형예술이라고 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