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예이론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6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6

 

  송 종 관 (철학박사 · 무심서학회 회장)


  2. 획의 철학


  3) ‘一’의 품격


  획(一)은 하나의 작은 선이다. 이 작은 선은 입체적(立體的)인 사람의 품격과 같이 여러 종류의 입체적 품격을 갖추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선은 곧 평면적(平面的)인 선이 아니라 입체적인 선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품격과 같은 정감이 있다. 이렇게 정감이 있는 선은 인간사회에서 실용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산물(産物)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식에서 보물같이 가장 귀한 개괄성(槪括性)과 추상성(抽象性)을 나타내는 의식을 띠게 되었다. 고대 사람들은 서로간의 인식하고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복잡한 언어나 그 외의 어떤 수단을 사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정확한 의사를 전달하거나 반영할 때는 종종 어떠한 상징성을 가진 부호로 그 의미를 개괄하거나 모호한 추상 그림으로 전달하는 수단을 취하였다. 나아가 어떠한 고대 철학적 의미로 복잡한 사물을 대할 때는 이들을 정확하게 명명하기가 어려우므로 곧 ‘道’ · ‘德’ · ‘一’ · ‘神’ · ‘韻’ · ‘虛’ · ‘无’ 등과 같은 명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렇게 가장 간단하게 만들어진 선은 간단하거나 복잡한 내용을 포함하는 부호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가장 간단한 것은 ‘一’을 지나쳐 볼 수 없고 가장 큰 것을 함유하는 것도 또한 ‘一’을 지나쳐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一’을 가장 철학적 이치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도 고대 사람들의 안목 속에 ‘一’을 숫자적 의미만 함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주역』의 팔괘에서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와 같은 간단한 선으로 모든 우주 만물의 이치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음으로 ‘상을 세워 그 의미를 다 설명했다(立像而盡意)’는 설, 유가에서는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넷을 낳고, 넷은 여덟을 낳으니 지극히 무궁하다(一生二, 二生四, 四生八, 以至無窮)’는 설, 도가에서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는 설, 불가에서는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 一切卽一)’라는 설을 들어 철학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서화가들 또한 이의 묘리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간단한 ‘一’의 품격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명 · 청 시대의 석도(石濤)를 대표로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一’이 모든 만물의 기본이요 만상의 뿌리이다. 수많은 글자가 이것으로 시작하거나 이것으로 끝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一’의 이치는 모두 만방(萬方)에 응해서 수많은 글씨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간단한 획(一)은 사람이 갖추고 있는 여러 품격과 같이 3가지 품격을 갖추고 있다. 이 3가지 품격은 간약성(簡約性), 변이성(變易性), 불역성(不易性)이다. 이들의 영향과 변화 그리고 작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간약성은 서예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간단한 선은 서예에서 정감의 무한공간을 농축하여 제공한다. 이렇게 농축된 선은 서예가 사람들에게 정감세계를 전달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선은 무한한 포용성을 갖추고 있으나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간단한 선은 정을 붙이고 의사를 전달하거나 풍부한 속마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주성연(周星蓮)도 그의『임지관견(臨池管見)』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글씨를 쓰는 것을 글자를 그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간단하게 그어진 획(一)은 공간을 분할하고 어떠한 경계를 한정한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글자를 그린다(畵)고 하지 않고 글자를 쓴다(寫)고 말하였다. 이 쓴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설문(說文)』에서는 ‘쓰는 것은 사물을 설립하는 것(置)’이라고 하였으며, 『운서(韻書)』에서는 ‘쓴다는 것은 내 보내는 것(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설립한다는 것은 사물의 형태를 설립함을 말하고 내 보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내보냄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의미가 서로 어긋남이 없는 이유는 글자는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만약 겨우 사물의 형태만 설립하고 나의 마음을 내보낼 수 없다면 그것은  글씨를 그린다는  畵자와 쓴다는 寫자의 두 가지 뜻을 모두 잃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서예작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하였다.1) 이와 같이 선은 정감이 배어 나오는 서정성을 강조하게 되므로 이를 기초로 한 서예는 비구상적인 ‘추상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하나의 간단한 선은 서예에서 일종의 가슴에 담고 있는 상(象)을 위주로 한 모호한 예술작품을 형성한다. 선 자신이 감상자들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무한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서예의 선은 사람들에게 확실하던 확실하지 않던 간에 풍부한 예술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것은 노자(老子)가 말하는 ‘道’와 같이 “황홀하고 황홀(恍兮惚兮)”하다 던지, “형상이 없는 형상이요, 사물이 없는 모양(无狀之狀, 无物之象)”과 비슷하다.

  변이성은 서예발전에 어떠한 변화를 꾀하는가?

  선의 간약성을 사물의 근원으로부터 관찰해보면 만물은 하나에서 시작한다(萬物始于一)는 것을 알 수 있고, 변이성으로 관찰해 보면 하나가 만물을 생산한다(一生萬物)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붓의 쓰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화하여 서체의 다양성을 이끌어 내었고, 다양한 서체 각각의 특이성으로 발전시키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 발전은 특히 행 · 초서에서 낭만적인 표현으로 글씨 그 자체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불역성은 서예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서예에서 선이 어떠한 형태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바뀔 수 없는 불역성의 하나이고, 간단한 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결구의 법칙이 불역성의 하나이고, 모호한 선을 이용한 추상예술이라는 것이 불역성의 하나이다. 이외에 서예가 오래 오래 썩지 않고 공고하게 존재하는 온정성(穩定性)을 결정함과 아울러 이의 발전과 혁신을 거듭하는 과정 속에 속박(束縛)과 억제력(抑制力) 그리고 타성(惰性)을 끊이지 않고 부여한다는 불역성도 있다.2)

  선(一)에는 이러한 간약성 · 변이성 · 불역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품격이 존재하듯이 선으로 이루어진 서예에 품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서예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8  (0) 2013.09.24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7  (0) 2013.08.24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5  (0) 2013.06.05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4  (0) 2013.06.05
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3  (0) 201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