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 1
송 종 관 (철학박사, 한림대학교 외래교수, 무심서학회 회장)
서론
서예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이 점은 서예작품의 위치에 대한 문제로서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할 점이다. 이 점은 곧 서예의 가치 향상을 위해서도 분명하게 밝히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이 철학인가? 철학은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로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견해 중에서 종교나 신화와 달리 이론적으로 정초된 견해를 가리킨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무엇보다도 사물의 궁극적 원리를 추구하는 이론적(사변적) 작업이다.”라고 하였다. 게다가 중국의 철학자 모종삼은 “인간의 감성이나 인성의 활동에 대하여 이지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반성하여 설명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1)라고 설명하였다. 사유는 무엇인가? 사유는 인간의 두되라는 형태로 특수하게 조직된 물질이 만들어 낸 최고의 사물로서 사고라고도 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 정신활동의 최고 형태이며, 사유의 본질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 및 과정들 속에 들어 있는 보편적인 것, 본질적인 것, 합법칙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반영하는데 있다. 서예는 이러한 철학과 사유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서예는 작가의 감성이나 인성의 활동을 그대로 담아 마음으로 쓰는 예술철학이다.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조건은 서예의 원리에도 있고 작가의 마음에도 있다. 이「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는 작품 속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밝혀내고, 그 속에 담겨있는 감성 및 인성의 내용을 이지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관찰하여 설명하는 작업이다. 무엇이 서예의 원리인가? 서예의 원리는 곧 점과 선이다. 이 점과 선은 충분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의 결구 또한 충분한 철학적 사유를 함유하고 있다. 점(●)은 유가적으로 해석하면 ‘태극(太極)’이며 도가적으로 해석하면 ‘도(道)’이다. 유가에서의 태극은 이른바 무극이 태극이니 움직(動)이면 ‘양’이요 고요(靜)하면 ‘음’이 되는 까닭의 본체라고 한다. 그러나 태극은 음양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음양이지만 그 본체는 음양이 섞이지 아니함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2) 우주만물의 생성은 이 태극 속의 음양이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태극 속의 음양의 작용은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넷을 낳고, 넷은 여덟을 낳으니, 이로써 무궁에 이르는 것이다(一生二, 二生四, 四生八, 以至無窮).”라고 설명 한다. 도가에서의 도는 원시혼돈이다. 도는 원시혼돈이지만 정지된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닌 영항(永恒)한 독립운동 즉 자기운동(自己運動)을 한다. 자기운동을 하기 때문에 도는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다. 생성의 원리는 “도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셋이 생기고, 셋에서 만물이 생겨난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는 것이다.3) 나아가 도는 유(有)와 무(無)의 통일을 요구한다. 유와 무의 통일은 공간에 대해 사유해야할 문제이다. 이 공간은 곧 서예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예가 공간예술의 범주에도 속하는 것이다. 공간예술인 서예의 가장 기초적인 변화는 음양의 변화와 공간의 변화이다. 변화의 방법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하여 붓의 면을 방향에 따라 달리하라는 것이며, 공간의 넓고 좁음에 대한 분별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서예의 감성이며 인성의 활동인가? 서예는 성정을 표현하고 애락이 형태로 나타난다. 게다가 하나의 점획을 그을 때 이미 작가의 심성이 자연히 노출된다는 점이 곧 감성이며 인성의 활동이다. 성정의 표현과 애락의 형태는 점선과 결구 및 장법에서 명확하게 관찰된다. 마음이 한가하고 즐거우면 글씨가 안정되고 상쾌하다. 그렇지 못하면 글씨는 거칠고 사납다. 이러한 형태의 표현들 중 거칠고 사나운 것은 좋은 의미로 말하면 사나이 기질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안정되고 상쾌한 것은 여성적이라고도 말한다. 이에 음양의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면 사나이 기질의 아름다움은 양강미라 하고 여성적 아름다움은 음유미라고 한다. 서예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미는 역시 음유미와 양강미가 잘 조화를 이룬 중화미이다. 서예미는 중화미를 으뜸으로 삼고는 있으나 이것이 계획대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과정은 창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섯 가지 합함과 어긋남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는 “정신이 고요하고 한가로울 때가 첫 번째 합함이요,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두 번째 합함이요, 날씨가 화창하고 천기가 온유할 때가 세 번째 합함이요, 종이가 먹 발을 잘 받아 서로 조화를 이룰 때가 네 번째 합함이요, 우연히 글씨를 쓰고 싶을 때가 다섯 번째 합함이다. 마음만 급하고 몸은 책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첫 번째 어그러짐이요, 권세에 핍박을 받아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어그러짐이요, 바람은 건조하고 날씨가 뜨거울 때가 세 번째 어그러짐이요, 종이가 먹 발을 잘 받지 않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네 번째 어그러짐이요, 마음이 태만하여 손이 나아가지 않을 때가 다섯 번째 어그러짐이다.”라고 하였다.4) 그는 이와 같이 창작할 때의 다섯 가지 합함과 어그러짐을 말하고, 합이 잘 이루어 졌을 때는 글씨가 유창하고 아름답게 되지만, 어그러지게 되면 가을에 서리를 맞은 나무처럼 거칠고 시든 모양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손과정은 창작 과정 중에서 주관적인 마음과 객관적인 환경 곧 마음과 붓이 함께 유창하게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경지가 되어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정황으로 보아 서예는 마음으로 긋는 붓질의 예술철학이다. 그러므로 본「철학으로 사유하는 서예」란 글에서는 서예의 본질과 그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감성이나 인성의 활동에 대하여 이지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살펴서 이론적으로 정초된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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